Mr. Kwon Stories

로마서9장 본문

메시지신약_유진피터슨

로마서9장

DavidKwon 2013. 6. 4. 13:46

내게는 늘 지고 다니는 큰 슬픔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이는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는 크 고통이며, 나는 한 번도 거기서 벗어나 본 적이 없습니다.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나의 증인이십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메시아께 저주를 받더라도 그들이 그분께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들은 내 동족입니다.  우리는 더불어 자랐습니다.  그들에게는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동족, 영광, 언약, 계시, 예배, 약속들.  더욱이 그들은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께서 태어난 민족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다스리는 하나님이시며, 영원히 그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뭔가 일을 제대로 못하신 것이 아니냐는 생각은 잠시라도 품지 마십시오.  문제의 발단은 많이 거슬러 올라갑니다.  혈통에 따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다 영에 따른 이스라엘 사람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해 준 것은 아브라함의 정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기억하십니까?  "네 가문은 이삭을 통해서만 이어질 것이다."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정체성은 결포 성행위를 통해 전달되고 인종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무슨 약속인지 기억하십니까?  "내년 이맘때쯤 내가 다시 올 때에는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때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리브가에게도 약속이 주어졌는데, 출생의 순서보다 우선하는 약속이었습니다.  리브가가 우리 모두의 조상인 이삭의 아이를 가졌을 때, 또 그 아이들이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선도 악도 행할 수 없는-태아였을때, 이미 그녀는 하나님에게서 특별한 보증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살펴볼 때, 우리가 분명히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분의 목적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안 하고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루어 질 수도 있고 안 이루어질 수도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분의 결정에 의해 결정되고 그분의 주도로 확정된 확실한 무엇입니다.  하나님은 리브가에게 "너의 쌍둥이 중에 둘째가 첫째보다 뛰어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후에 이 말씀은 "나는 야곱을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딱딱한 경구 형태로 등장합니다.

이것을 두고 우리가 하나님은 불공평하시다고 불평할 수 있을까요?  부디, 성급하게 판단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비도 내가 베푸는 것이고, 긍휼도 내가 베푸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긍휼은 우리의 동정 어린 심정이나 도덕적 노력에서 비롯되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에서 비롯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하신 말씀도 같은 요지의 말씀입니다.  "나는 나의 구원 능력이 펼쳐지는 이 드라마에서 너를 단역으로 쓰려고 골랐다."  이 모든 이야기를 한마디로 하면, 결정권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주도하셨다면, 결정권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주도하셨고, 우리는 그 일에서 좋은 역할이든 나쁜 역할이든 우리 역할을 할 뿐입니다.

이렇게 이의를 제기하시렵니까?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단 말인가?  큰 결정은 이미 다 내려져 있는데, 대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대체 여러분은 누구이기에 이런 식으로 하나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사람이 감히 하나님을 문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진흙이 자기를 빚고 있는 손을 향해 "왜 당신은 나를 이런 모양으로 만들고 있습니까?"하고 묻는 법은 없습니다.  한 진흙덩이로는 꽃을 담는 병을, 또 다른 진흙덩이로는 콩 조리용 항아리를 만들 수 있는 완전한 권리가 토기장이에게 있는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노여룸을 보여줄 목적으로 한 모양의 도기를 특별히 고안하시고, 당신의 영광스런 선을 보여줄 목적으로 또 다른 모양의 도기를 정교히 제작하셨다는 것에, 대체 무슨 문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전자나 후자나 또는 두 경우 모두에 유대 민족이 해당될 때가 있었고, 이는 다른 민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호세아가 이를 잘 표현해 줍니다.


내가 이름 없는 사람들을 불러 이름 있는 사람들로 만들겠다.

내가 사랑받지 못한 사람들을 불러 사랑받는 사람들로 만들겠다.

사람들이 "이 하찮은 것들!"이라고 퍼붓던 그곳에서,

"하나님의 살아 있는 자녀들"이라고 불리게 되리라.


이사야도 이런 사실을 역설합니다.


해변의 모래알 하나하나에 다 숫자가 매겨지고

그 합한 것에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이라는 라벨이 붙더라도

그것들은 여전히 숫자에 불과할 뿐, 이름이 아니다.

구원은 택하심을 통해 오는 것,

하나님은 우리를 수로 세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를 이름으로 부르신다.

산술은 그분의 관심이 아니다.


이사야는 앞날을 정확히 내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능하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살아 있는 자녀를 유산으로 남겨 주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유령 마을처럼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것을 모두 종합해 보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하고 계신 일에 관심없어 보였던 사람들이, 실제로는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 곧 그들의 삶을 바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일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고 계신 일에 대해 읽고 이야기하는 일에 그토록 관심 많아 보였던 이스라엘은, 결국 그것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그것을 놓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대신에, 자기 자신을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하나님 프로젝트'에 너무도 푹 빠져 있어서, 그만 바로 눈앞에 계신 하나님을 주목하지 못했습니다.  길 한복판에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 같은 그분을 말입니다.  그들은 그분과 부닥쳤고 큰 대지로 쭉 뻗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도!) 이사야가 은유를 통해 이를 잘 표현해 줍니다.


조심하여라!  내가 시온 산으로 가는 길에 큰 돌을 놓아두었다.

너희가 피해 돌아갈 수 없는 돌을 두었다.

그런데 그 돌은 바로 나다!  그러므로 너희가 나를 찾고 있다면,

길 가다 내게 걸려 넘어지지 않아야 비로소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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